ARCHIVE FOCUS ⎮ 1호 1977. 1. 7. 박서보가 아내 윤명숙에게 쓴 편지



자료 출처: 박서보 편지모음집 No.4(1976~1977)


내 사랑스러운 처에게.


오늘이 30일. 산책 삼아 몽빠르나스에 있는 후낙[FNAC]이란 백화점에 들렸오. 2층 서럼[점]에 갔더니 전4권으로 된 오늘의 추상미술이란 아주 크고 두터운 호화판 화집이 있지 않겠오? 그래서 보는것이야 꽁짜니까 1권에서 4권까지 내리 보았지. 그랬더니 제4권째에 가서 일본·한국·중국·인도의 현대 미술이 도판과 함께 실렸는데(대부분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가들임) 한국은 도판은 없고 1엽에 걸쳐 밋셸·라공[Michel Ragon]이란 유명한 평론가가 썼더군. 첫머리부터 내 이름이 나오면서 우짜구 저짜구 했더군. 중간쭘 가서 윤명로가 나오고…. 63년도 제3회 파리비엔날에 출품했을 때의 것을 토대로 한국 현대 미술을 보려했던 모양이야. 이응로, 이성자 등등의 이름도 나중에 비치더군. 이 제4권째 것만 살려고 했더니 우리나라 돈으로 3만원. 그래 사지를 않고 돌아갈 무렵에 돈이 남으면 살까 해. 당신이 부탁한 재봉실은 하나에 우리돈으로 600원꼴. 20개를 사 놓았고. 크리스챤 디올 분 두 곽과 코티분 세 곽을 사놓았오. 스카-프는 기누로 된 것으로서 메이커는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괜찮은 것 같아(값은 6천원정도라) 4매를 샀오. 1월 1일부터 또 물가가 마구 뛰니 말이요. 혹시 당신이 필요한 것 있으면 부탁하구려. 크게 비싸지 않으면 사다줄 터이니까. 여름에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캠핑을 가드라도 밥 해 먹자면 고생이라 캠핑용 깨스통을 중간 크기(40시간용)과 작은 것(10시간용) 두 개를 약 3만3천원 정도 주고 샀오. 깨스는 모다 쓰고 빈 것을 배편으로 부칠까 해서. 그것만 있으면 국내에서 깨스를 넣어 휴대하면 어데라도 가서 자유롭게 해 먹을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오. 오늘은 77년 1월 1일. 새해 복 많이 받구려. 아이들에게 세배돈이나 두둑히 주었는지? 31일 저녁을 초라하게 호텔 방에서 작품하면서 지냈오. 매우 쓸쓸합디다. 오늘은 일전에 중국 식품점에서 사다 놓은 떡국용 떡 말려 놓은 것을 이대 불문과 교수인 최성민씨와 둘이 끓여먹고, 새해 아침 기분을 냈지. 최교수는 1월 18일경 서울로 돌아가는 데 빨리 가지 못해 안달이 났구려. 그분과 둘이서 룩쌍부르공원이랑 쎄에느 강가를 산책하면서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곤 하면서 신년을 맞는 초일을 보냈오. 촌놈처럼 쎄에느 강에서 10프랑식 주고 관광배를 타기도 하고….


1월 3일. 오늘이 서울을 떠난지 꼭 한달이 되었구려. 파리에 죽원이라는 한국 음식점이 있는데 이 곳 주인이 김병기씨 형님의 아들이며 김창열씨의 중학교 동기동창생이라 나와도 잘 아는 사이요. 이 분이 오늘 저녁을 초대하여 자기 집에서 창열 내외, 최교수와 내가 가서 평양식 빈대떡에 김치 그리고 냉면 등을 마음끽 먹었오. 오랫만에 순 한국식 제 맛을 파리에서 본 셈이구려. 호텔로 돌아와 냄새가 쾨쾨한 방문을 여니 기다려주던 당신이 없으니까 무척 쓸쓸해 못견디겠소. 당장 짐을 챙겨 가지고 서울로 돌아가고픈 심경을 달래노라고 애 깨나 먹었소. 1월 5일. 호텔의 편지통을 매일같이 몇 번식 들여다 보아도 내겐 편지가 없으니까 무엇인지 모르게 쓸쓸하기만 하오. 가능한 한 편지 좀 자주 해주기 바라오. 오늘은 처량한 생각도 들고 해서 작품 제작에 몰두하여 1월 들어서선 가장 오랜 시간을 작품 제작만 한 셈이지. 새벽 5시 경에나 잤으니까 말이요. 1월 6일. 승조, 승호, 승숙이를 주려고 영국 뉴톤 회사제 수채화를 샀오. 그것을 내 방에 갔다 놓코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 가서 쎄자르라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조각가의 대회고전을 보았더니 매우 훌륭합디다. 어떤 놈의 회고전은 너절해서 구역질만 나기도 하고… 만약에 국력이 있어 그곳에서 내 회고전을 개최한다면 꽤나 관심을 모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드구만. 파리의 화랑들이 대체로 1월 15일이 넘어야 문을 열 것이라 믿소. 한 두 군데 전위화랑들에선 1월 19일과 그 후에 와서 내 그림을 보기로 했다오. 카다로그를 보곤 무척 좋아하는데, 결과는 그 자가 와봐야 할 것 같소만. 1월 7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찬밥을 국에 말아 먹곤 작품 제작 중이오. 요지움 몇 일 간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당신이 스치듯 꿈 속에 나타나는데 혹시 몸이라도 아픈 것 아닌지? 내가 서울을 떠나 온 후 이제까지 편지냐곤 한 통 뿐이니까 최교수는 물론 심지어 일본 화가나 호텔 주인도 내게 가족이 없느냐는 식이지. 아이들은 모다 무고하오? 명순이는 돌아왔는지? 이 것 저 것 모다 궁금증 뿐이구려. 그럼 각별히 건강에 유의해주기 바라면서 이만 주리오.


1977년 1월 7일 아침에 파리에서 박서보가.



<표기원칙>

- 한글음독본 : 한문표기와 한자어권 고유명사는 독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그 외 서양어권의 고유명사는 외국어 원문을 그대로 표기하였다.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글 옆에 소괄호 ( )로 한문을 병기하고, 수기로 수정된 부분은 수정 이후 단어로만 표기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에 사용된 기호는 현대한국어 문법에 맞추어 교정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어 표기 시 사용되는 낫표 「」는 생략, 겹낫표 『』는 의미상 사용에 따라 따옴표 ' ' 와 쌍따옴표 " " 로, 그리고 단어 병렬 시 사용되는 · 는 쉼표 , 로 교정했다. 확인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한다. 틀린 정보(인명, 전시명 등)와 보다 정확한 명칭이 추정되는 경우에는 대괄호 [ ] 에 병기하거나 긴 내용의 경우에는 주석을 달았다.


[자료 설명]

이 자료는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서보가 1976년 12월부터 1977년 봄까지의 방학기간에 체류하던 파리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소회를 기록하여 아내 윤명숙에게 전한 편지이다. 박서보는 일찍이 한국미술의 국제적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해외 현지의 화랑들과 접촉하며 자신과 한국 화가들의 작업을 알리고 전시를 개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썼다. 또한 박서보는 1960년대부터 자신의 일상과 작품, 전시, 그리고 교류 지인들과 관련된 기록과 사진을 아카이빙하기 시작했다. 집을 떠나게 되면 자신의 일과와 생각을 일기처럼 기록하여 본가에 있는 아내에게 전했으며, 1961년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 참가로 처음 국외로 떠나 보낸 엽서에서 아내에게 자신이 보낸 편지를 잘 보관하도록 당부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자신이 국내외 미술계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서신을 모아 편지모음집을 작성했다. 30여 권에 달하는 박서보 편지모음집은 박서보 아카이브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며, 전시 자료나 출판물 등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한국 현대미술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글 최윤정

이미지 임한빛